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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익히고 즐기기

카투사 영어 조난 구조 사례 (영어원서낭독)

급히 영어를 잘해야 할 때가 있다. 내 경우는 20대 초반에 갑자기 그랬다. (지금도 2년에 한 번 정도 외국인들과 회의할 일이 생겨서 급 잘해야 한다)

 

22살에 카투사로 군입대했다. 논산에서 6주 훈련을 마치고 의정부 캠프잭슨에서 추가 훈련을 받았다. 거기서 영어시험을 봤는데, 5등 안에 들었다(고 들었다). 시험에 말하기 평가가 없었다. 

 

내 때는 교육대에서 받은 영어시험 성적에 따라 카투사 보직이 배정되었다. 5등 내는 어학병, 30등 내는 행정병, 이후부터는 보급병, 통신병, 기타 등등하고 약 절반은 전투병이었다. JSA는 특이하게 지원을 받았다. 성적 상위 50% 중에서. (JSA 지원을 하고 후회를 하는 카투사가 많았다. JSA에서 외부로 나오기 불편했기 때문이다. 카투사는 평일 퇴근하고 놀러 가는 게 개꿀)

 

성문기본영어 베이스에 군입대 전까지 해외 나가본 적 1도 없는 토종 한국인, 운도 없게 카투사 어학병이 되었다. 매일매일 빡세게 주요 회의, 나아가서는 대언론 통역과 번역 업무를 하게 되었다. 

얼마전 다녀온 치악산자연휴양림

보통 카투사 가서 편하게 놀고 온다. 하지만 나는 카투사로 사무실 배치받자마자 반품 협박에 시달렸다. 소속된 미군 사무실에서 통역과 번역 몇 번 시켜보더니 한국군에 반품하겠다는 것이다. 한국군지원단(이름이 기억 안 나네)에서 기분 나쁘다고 반품에 반대했다. '어디 감히 카투사를 골라 쓰려고 해', 뭐 그런 것이다. 

 

대부분 해외 교포였던 같은 부대 어학병들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영어 못하는 어학병에 외모도 구리고 배경도 구리고 성격도 만만치 않은 신병을 좋아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알고 있었겠지만, 나도 너네 별로였다. 

 

서두가 길었다. 나는 급히 영어를 잘해야 했다. 한국군으로 돌려보낸다고 하니 자존심도 상하고, 가기도 싫었다. 카투사에서 매일 퇴근하고 과외도 하고 데이트도 하며 꿀빨고 싶었다. 영어만 잘하면 된다. 현기증 난다. 

 

예전부터 공부를 성실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요령에 강한 스타일이다. 머리를 쥐어 짜보았다. 

 

내는 영어에 대한 지식은 충분하다. 초중교대학교까지 내가 외워댄 영어단어가 왠만한 미국 중고생보다 많을 수도 있다(내만 그런가? 공부 좀 잘한다는 학생들은 다 그렇다). 영어로 기본적인 회화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전문적인 통역을 할 수는 없다. 왜? 사람들 앞에 서면 말문이 막히고 심장이 뛴다. 영어단어와 문장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입으로 영어가 튀어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단기간에 승부를 봐야 한다. 미쿡놈들이 한 달이나 나를 놔둘 것 같지 않다. 1~2주 안에 웬만한 통역은 가능할 정도로 실력이 올라야 한다.  

 

내가 한국어를 마스터한 과정을 뒤돌아보자. 내는 한국어를 어떻게 잘하게 되었나? 기본적인 한국어회화야 가족과 하루 종일 했지만, 공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한글 실력이 크게 증가한 계기는 무엇이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답이 나왔다. 

 

내 한국어 실력은 책을 낭독하면서 크게 늘었다. 초등학교 저학년때 낭독을 많이 했고, 그때 말을 하는 것이 능숙해졌다. 왜 그랬을까? 긴장을 하고 큰 소리로 책을 낭독하면서 뇌의 언어 관련 기능이 활성화되지 않았을까?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종종 순서대로 일어나서 낭독하게 시켰다. 그때 특히 한국어로 사람들 앞에서 발표한다는 감각을 익혔다. 영어 낭독이 통역을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당장 미군 도서관에서 존그리샴이 쓴 영어소설 원서를 하나 골랐다. 제목은 생각나지 않는다. Runaway Jury 였던가. 큰소리로 책을 읽었다. 콩글리시 발음으로 끊이지 않고 읽을 수 있을 때까지 한 페이지씩. 큰 소리로 소리 내서 계속 읽었다. 부대 내에서 핵아싸였기 때문에 퇴근하고 또 주말에 시간 남아돌았다. 주말 내내 큰소리로 책을 읽었더니 월요일에 그럭저럭 말문이 트였다. 응?

뭐가 이렇게 효과 좋아. 두통이 왔는데 타이레놀3배레버리지 먹은 기분이었다. 좋다. 아주 입이 헐 때까지 소리 내서 읽었다. 소설을 낭독하는 거라 크게 지루하지 않았다. 문장을 외우는 게 아니라 반복을 많이 하지도 않았다. 그냥 한 페이지를 그럭저럭 잘 낭독할 때까지 계속 큰 소리로 읽는 것이다. 체력만 있으면 되는 공부 방법이다. 예상치 못했던 효과는 영어 듣기도 갑자기 잘 되었다. 나름 원인을 분석했다. 말을 할 수 있으면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내 영어 실력은 1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간신히 영어통역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왔다. 한국군으로 돌려보낸다는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이후로 영어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내는 정말 급해서 영어공부를 한 거지 뭐 하나에 미쳐서 공부하고 그런 거 안 좋아한다. 요령 있게 여유 있게 사는 인생. 

 

이제는 영어를 안한지 20년이 넘어가고 갑자기 길에서 외국인이 말을 걸면 더듬거린다. 그래도 급하게 잡힌 해외출장이나 회의가 있으면 하루 전에 적당한 영어 소설책 하나 잡고서 한두 시간 큰 소리로 읽는다. 그러면 다음 회의 때 그럭저럭 영어를 씨부릴 수 있다. 큰 거 바라면 안 된다. 당장 급할 때 타이레놀3배레버리지처럼. 

※ 참고 : 

2019/05/13 - [일상다반사] - 영어쉐도잉 vs 지속가능한 영어원서낭독